한국불교신문 제 630호(2014년 11월 20일자) 특강

염불선은 신라때부터 오늘날까지 일관되게 전해온 한국불교의 아름다운 ‘전통’

오직 마음이 정토요,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이라는[唯心淨土 自性彌陀] 이른바 염불과 선(禪)을 하나로 묶어 수행하는 것을 ‘염불선’이라 한다. 제방의 염불원(念佛院)에 염불행자가 넘쳐나고 염불하는 소리가 힘차게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와야 한다

▲ 보제존자 나옹혜근 스님의 진영.
염불선(念佛禪)

고려시대 공민왕(恭愍王)의 왕사로 나옹(懶翁, 1320~1376)이라는 큰스님이 계셨다. 요즘도 불사를 거행할 때는 지공(指空, 1289~1363)화상 그리고 무학(無學, 1327~1405)대사와 함께 삼증사(三證師)의 한 분으로 모시는 어른이다.
스님의 법호를 잊지 않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먼저 떠올려보자.

나옹스님과 고양이의 인연
스님께서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머무시던 어느 날이다. 볼 일이 있어 마을로 내려가시는 도중에 스님을 반기는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 발견하셨다. 그냥 두고 갈 수 없을 만큼 아주 가녀린 녀석이었다. 그래서 어미 고양이가 근처에 있겠거니 하고 한참을 기다리셨다. 그래도 어미는 나타나질 않았다. 그냥 두고 갈까도 하였지만 자칫 큰 짐승에게 해를 당할 것 같았다. 절하고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아 늦게라도 어미가 찾으러 오려니 생각하시고 새끼 고양이를 장삼 소매에 넣으신 채 마을로 가 일을 보셨다. 절로 돌아오신 스님께서 막 장삼을 벗으시려는데 뭔가가 툭 떨어졌다. 아까 그 새끼 고양이였는데 거의 죽어가는 지경이었다. 깜짝 놀란 스님께서 고양이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
고양이가 간신히 대답했다. “배가 너무 고파 그렇습니다.”
“인석아, 그러면 나를 불러 먹을 것을 달라고 할 일이지.”
“스님 법호를 제가 모르지 않습니까.”
“아, 그랬구나. 나는 ‘나옹’이라고 하느니라.”
그 후로 고양이는 후딱 하면 ‘나옹~, 나옹~’ 하면서 스님을 찾았다. 지금도 고양이 우는 소리를 잘 들어보면 그렇게 들린다, 특히 배가 고플 때면.

가까운 사람 제도하기
공민왕의 왕사이신 나옹스님께도 풀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니, 문제라기보다 숙제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다름 아니라 속가 누이동생을 교화하는 일이었다.
역시 스님께서 회암사에 계실 때의 일인데, 매씨(妹氏)되는 분께서 오라버니인 나옹스님을 뵙기 위해 가끔 절에 오시곤 했다. 그러면 스님께서는 누이동생에게 염불수행을 권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매씨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오라버니께서 이 나라의 왕사이신데 제가 왜 염불을 해야 합니까?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어련히 좋은 곳으로 보내주지 않으시겠는지요.”
이렇듯 막무가내인 매씨를 제도하기로 작정하신 스님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셔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좌승에게 이르셨다.
“얘야, 오늘 내 누이동생이 올라올 것 같구나. 허면, 곧 점심시간이 되겠지. 그런데 오늘은 외상을 들이려무나. 그리고 내 앞에다 놓도록 해라.”
사찰에서야 으레 발우공양이었지만, 오누이간에 다정한 시간을 보내시라는 사찰측의 배려로 겸상을 해 드렸던 모양이다. 상좌승이 여쭈었다.
“동생 분께는 어떻게 할까요?”
“더 이상 묻지 말고, 내가 큰기침을 하거든 상만 물리면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매씨가 올라왔다. 그리고 이내 점심시간이 되자 상좌승은 스님께서 일러 주신대로 했다. 정작 시장한 쪽은 산사까지 오르느라 애를 쓴 매씨였지만 스님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공양을 혼자서 드시기 시작했다.
매씨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지라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무언가 특별한 공양이 나오려니 하고 내심 기대했다. 그렇게 시장기를 꾹 누르고 있었다. 공양을 마치신 스님께서 큰기침을 두어 번 하시자 상좌승이 들어와 상을 내갔다. 그런데도 매씨가 기대했던 특별공양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시장기가 지나쳤던지 매씨 배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시장하던 차에 민망하기까지 했다.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스님께 따지듯 물었다.
“오라버니,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이 산사에 오른 것은 오라버니를 뵙기 위해서인데, 이 동생에게 밥 한술 주는 것이 그리도 아까우셨던 겁니까?”

쇠뿔도 각각, 염불도 몫몫
배고픈 설움이 제일이라더니 설움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겐가? 시장하시다니….”
너무도 기가 막혔다. 이제는 설움이 아니라 화가 나서 대들 듯 따졌다.
“공양을 드신 게 오라버니이신데 그럼, 제 배가 부르겠습니까?” 하였다.
그런데 뜻 밖에도 스님께서는 잔잔히 웃고 계신 게 아닌가. 매씨는 그제야 왜 지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제 아시겠는가. 내가 밥을 먹으면 내 배가 부르고, 자네가 자시면 자네 배가 부른 것처럼 염불에도 각자 자기의 몫은 따로 있는 법일세.”
매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내 한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오라버니 말씀을 알아듣기는 했습니다만, 이제와 새삼스럽게 염불을 한들 뭘 하겠습니까? 오라버니께서는 일찍이 출가하셔서 왕사까지 되셨지만, 해로 친다면 저는 이미 서산에 걸렸으니 말입니다.”
여생이 그리 많지 않음을 탓하며 미리 포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매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인가?”
뜻밖의 질문에 의아해 하며 누이동생이 대답했다.
“그야 제 오라버니 아니십니까. 그리고 또, 이 나라 왕사이시기도 하구요.”
“왕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세. 제 누이동생조차도 제도하지 못한다면 어찌 왕사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누이동생은 스님께 바짝 다가앉았다. 그리고 그러는 그녀의 눈빛은 절실했다.

염불선의 진수(眞髓)
스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내가 일러주는 대로 염불을 하시게. 우선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어르신이 아미타불이시니 ‘나무아미타불’을 끊임없이 부르도록 하시게. 그런데 이때 주의할 것이 하나 있네.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기에 앞서 반드시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어디 계실까?’하고 생각하면서 하셔야 하네. 그리하면 머지않아 자네 몸에서도 부처님과 똑같은 금빛광명이 뻗쳐 나올 것일세.”

阿彌陀佛在何方(아미타불재하방)
서방교주 아미타불 어드메에 계시온지
着得心頭切莫忘(착득심두절막망)
마음깊이 새겨두고 바라노니 잊지마소.
念到念窮無念處(염도염궁무념처)
모든망념 다하여서 분별없는 경계라면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금광)
몸과마음 그언제나 자색금빛 놓으리라.

기연(機緣)이 성숙했음인지 매씨는 분연히 일어나 대웅전으로 가더니 부처님께 분향삼배하고 이내 하산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매씨의 입에서는 ‘나무아미타불’ 염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신 주의사항도 잊지 않았다. 앉으나 서나,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한결 같았다.
회암사에 올라가는 일도, 오라버니를 뵙는 일도 잊어버린 채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갓난아이가 어미를 찾듯 ‘나무아미타불’만 염하였다, 끊임없이.
한편, 매씨를 못 본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나옹스님께서는 가만히 날짜를 꼽아보셨다. 그리고 혼자말씀으로, ‘조만간 이 사람을 볼 수 있겠구먼…’ 하셨다. 명의(名醫)가 환자에게 약을 지어주고 치료 방법을 일러 줄 때는 그 치유될 시기까지도 짐작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 되지 않아, 매씨가 회암사로 스님을 뵈러 올라왔다. 하산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두 분의 눈길이 마주치자 매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지난 번 오라버니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찾아 뵈었습니다.”
도인끼리는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법, 스님께서도 환히 웃으며 말씀 하셨다.
“오늘따라 자네가 더없이 반갑구먼. 그나저나 방금 은혜를 갚는다 했으니 그것도 궁금하고.”
그러자 매씨는 다음과 같은 게송 한 수를 읊었다.

極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서방정토 극락세계 만월모습 아미타불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미간백호 금색광명 온허공을 비추시니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그누구든 일념으로 미타명호 칭하오면
頃刻圓成無量功(경각원성무량공)
순식간에 무량한공 원만하게 이루리라.

매씨의 말씀이 끝나자 두 분 사이에는 석가세존과 가섭존자께서 나누셨던 영축산의 미소가 잔잔히 피어올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염불만으로도 과연 도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상기해야할 것은 한국불교의 특징이 원융불교(圓融佛敎)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특징이 방금 전 나옹스님과 매씨의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스님께서 제시한 염불방법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매씨를 위해 말씀하신 게송의 ‘기’구와 ‘승’구에서 강조하셨듯 화두를 드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오직 마음이 정토요,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이라는[唯心淨土 自性彌陀] 이른바 염불과 선(禪)을 하나로 묶어 수행하는 것을 ‘염불선’이라 한다. 그리고 이 염불선은 신라의 원효스님으로부터 고려의 보우(普愚)스님과 나옹스님 그리고, 조선의 보우(普雨)스님, 기화(己和)스님, 휴정(休靜)스님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일관되게 전해오고 있는 한국불교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이런 아름다운 전통은 이어나가야 한다. 제방의 염불원(念佛院)에 염불행자가 넘쳐나고 염불하는 소리가 힘차게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와야 한다. 때는 바야흐로 염불하기 딱 좋을 때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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