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세우고 방동화스님 등 큰스님 지극 시봉... 8남매를 모두 불자로

▲ 원만화 이의열 보살.

200년 무불(無佛)시대였던 제주도에 광명사 등 절을 세우신 분.  3 • 1운동보다 앞선 1918년 서귀포 법정사 항일운동을 했던 방동화 스님을 시봉하고, 제주불교 중흥조인 안봉려관 스님에게 불교를 배우며 스님들을 정성껏 뒷바라지한 분. 8남매 모두를 스님과 불자로 길러낸 원만화 이의열 보살이 7월 9일 향년 104세로 타계했다.

원만화 보살의 장례는 제주 서귀포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정방사, 광명사 스님들과 신도들이 동참한 가운데 5일장으로 치러졌다.

원만화 보살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혜일스님의 어머니이다. 8남매 뿐 아니라 손자들과 외손자도 사찰 청년회 회장, 불교대학 동문회장 등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으며 각자의 몫을 하고 있다.

▲ 혜일스님 등 아들과 손자들이 빈소에서 어머니 원만화 보살의 삶을 회고하고 있다.

원만화 보살은 8세 때부터 친정어머니를 따라 법화사를 다니며 불연을 쌓았다. 제주불교 중흥조로 관음사를 창건한 안 봉려관 스님에게 불교를 배웠다. 또한 3 •1운동보다 앞선 1918년 서귀포 법정사 항일 운동을 했던 방동화 스님과 근대불교의 큰 산맥 동산스님 등을 정성껏 시봉하면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 노력해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원만화 보살은 절에 먹을 것이 없으면 직접 탁발해 사찰 운영을 도왔다고 한다. 제주 법화사 초대 신도회장을 지냈던 남편과 함께 척박한 제주도에서 부처님 법을 꽃피우고자 노력해 주위 신도들로부터 ‘대보살’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 원만화 보살의 장례는 제주 서귀포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정방사, 광명사 신도들이 동참한 가운데 5일장으로 치러졌다.

발인을 하루 앞둔 12일 혜일스님은 “어머니 원만화 보살은 늘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과 스님을 공양했으며, 일생을 서귀포 불교를 위해 헌신했다”고 회고했다.

“8남매 중 다섯째인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당시는 구하기 힘들었던 <한글 반야심경>을 구해오셨다. 나에게 5번을 읽어달라고 하셨다. 5번을 읽었더니 어머니가 한글 반야심경을 모두 외워버렸다. 어머니를 따라 나도 그때 <한글 반야심경>을 외우게 됐다. 그 인연으로 나는 불교와 인연을 맺었고, 학창시절에는 불교학생회 회장도 했으며 결국 덕암 큰스님 문하로 출가를 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내가 출가한 뒤 어머니와 서로 경어를 썼다. 어머니와 아들 관계였지만 출가한 뒤로는 도반처럼 서로의 수행을 격려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했다.

▲ 원만화 이의열 보살은 혜일스님(사진 앞줄 맨 오른쪽)을 비롯 8남매 모두를 스님과 불자로 키웠다.

혜일스님은 “지난 1997년부터 제주 정방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다. 은사 덕암 큰스님과 함께 어머니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산다. 큰스님과 속가 식구에 누(累)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원만화 보살의 아들 강부택 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일생을 농부로 살아왔다. 일할 때는 일하고 어머니가 절에 가자면 모시고 절에 갔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다”고 했다. 부철 씨 역시 “나도 어머니와 절에 다니면서 동생스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다”고 했고, 부윤 씨도 “형제들 신심은 모두 어머니를 빼닮았다. 나도 젊어서는 절의 청년회장을 지냈다. 부처님과 절에 헌신하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닮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원만화 보살의 영결식에 동참한 정방사 광명사 불자들.
장손 강동욱 씨는 “어려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잡고 절에 가서 뛰어놀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원만화 보살)는 광명사를 세운 주인공”이라면서 “할머니가 98세 되던 때까지 신도들이 집에 찾아와 부처님오신날 행사 준비의 조언을 듣고 갔다”고 회상했다.

생전에 늘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잊지 않았던 원만화 이의열 보살은 13일 영결식 후 서귀포 가족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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