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고 - 만 춘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

▲ 만춘스님(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

민족의 명절인 추석이 보름여 앞으로 다가왔다. 추석(秋夕)은 ‘가을 저녁’이라는 말이고, 한가위는 정 중앙 즉, ‘보름’이라는 뜻이니 팔월한가위는 팔월대보름을 의미한다. 가배(嘉俳)는 축제를 의미하며, 그 연원이 신라 유리왕(儒理王)에 두고 있다. 즉 추석은 불교와 관계있는 명절로 ‘큰 나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라불교의 북방전래와 남방전래

교과서대로라면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서기 5세기경의 일로 눌지왕(訥祗王. ?~458) 때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에 의해서이다. 이는 북방전래설로서 한반도에서 가장 늦게 전래된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남방전래설에 관한 문제이다.

<삼국유사>의 ‘금관성바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條)에 의하면, 금관 호계사(虎溪寺)의 바사석탑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후(許皇后)인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 24년 갑신(甲申,  서기 48년)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올 때 배로 모시고 온 것이라 한다. 이렇게 치면 불교의 전래가 서력 372년인 고구려보다도 오히려 300년 이상 더 빠르다.

이런 인연은 쌍계사 칠불 아자방(七佛亞字房)과도 연결된다. 가락국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허황후 사이에는 9명의 왕자가 있었고 그 가운데 7명의 왕자가 외삼촌인 장유보옥(長有寶玉) 화상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2년 만에 성불하였다고 하는데, 그 소식을 접한 수로왕과 허황옥은 이런 사실을 기리려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이것이 하동에 있는 칠불암(七佛庵)이다.

여기에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897~911) 때 구들도사로 불린 담공(曇空) 선사의 이야기도 빠트릴 수 없다.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시설인 구들을 개발하신 스님인데 이분의 대표작이 다름 아닌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칠불아자방(七佛亞字房)’이다.

담공선사가 선방인 벽안당을 아자(亞字)모양으로 구들을 놓았는데 벽 둘레가 높고, 가운데가 낮은 모양으로, 낮은 곳의 모양이 아자(亞字)와 같아서 아자방으로 불렸으며 천여 년을 지내는 동안 한번도 개수한 일이 없다고 한다. 초기에는 한번 불을 때면 100일 가량 따뜻했다고 한다. 100년마다 한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로써 청소를 하면 아무런 부작용이 없이 불이 잘 지펴져 방주위의 높은 곳부터 따뜻해져 그 온기가 오래도록 유지되었다고 한다.

유리왕의 업적 기린 도솔가

방금 언급한 허황후에 의한 남방전래설 보다 약 20년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사료가 있다. 다름 아니라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보이는 ‘도솔가(兜率歌)’에 관한 것이다. 도솔가는 서기 28년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儒理尼師今. 24~57 재위) 5년 11월 임금이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순행하던 중 한 노파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데서 발단을 찾을 수 있다. 다음의 내용은 <삼국사기>에 있는 것이다.

5년(서기 28) 겨울 11월,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돌아보다가 한 노파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몸으로 왕위에 앉아,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없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토록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하고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곳곳마다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과 늙고 병들어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주어 부양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웃나라의 백성들이 이 소문을 듣고 옮겨 오는 이들이 많았다. 이 해에 백성들의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여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의 시초이다.(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嫗飢凍將死曰 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 使老幼 至於此極 是予之罪也 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鰥寡孤獨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於是 隣國百姓 聞而來者衆矣 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 歌樂之始也)

즉, 도솔가는 백성이 즐겁고 편안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니 요즘의 개념이라면 ‘태평가’ 정도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도솔가는 우리나라 가악(歌樂)의 시초인데, 노래의 제목이 왜 도솔가였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여기서 ‘도솔’은 도솔천(兜率天)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육욕천(六欲天, 욕계(慾界)에 속한 여섯 하늘. 사천왕천(四天王天), 야마천(夜摩天), 도리천(忉利天), 도솔천(兜率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넷째 하늘이다. 수미산의 꼭대기로부터 12만 유순(由旬) 되는 곳에 있으며 미륵보살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내외(內外) 두 원(院)이 있는데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이며 외원은 천계대중이 선업으로 즐겁게 사는 곳이라 한다.

상황이 이럴진대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도솔가라는 이름이 성립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4년 후 내용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임금은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두 편으로 나누고, 임금의 두 딸로 하여금 각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려 편을 짜게 하였다. 이들 두 편은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새벽에 큰 부의 뜰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여 밤 열 시경에 끝냈다. 그들은 8월 15일이 되면 길쌈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헤아려서, 진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편에 사례하였다. 이때 노래와 춤과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였는데, 이 행사를 ‘가배’라고 하였다. 이때 진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는 소리로 “회소, 회소!”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우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이 곡에 노랫말을 붙이고, ‘회소곡’이라고 하였다.(王旣定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之庭績麻 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小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歌舞百戱皆作 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子 起舞嘆曰 會蘇 會蘇 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여기서 말한 길쌈은 실을 내어 옷감을 짜는 일을 말하는데, 옷감은 생필품이기도 하지만 화폐가 발달되기 이전에는 화폐의 역할(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 가운데 폐백목이라는 것이 있다. 임꺽정전에도 그 일행이 주막에서 먹은 음식과 술 대금으로 포목을 내어주는 장면이 있다)을 했던 것이기도 하다.

▲ 서울 은평구 열린선원에서 불자들이 추석차례법회를 지내며 조상님께 차를 올리고 절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 열린선원 홈페이지

그런데 이렇듯 편을 나누어 짠 피륙의 쓰임새에 대해 <사기>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마련하고 춤과 노래를 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피륙의 사용처는 필시 사회복지 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도솔가가 나오고 난 다음의 일임을 감안하면 그러려니와 이런 행사를 ‘가배(嘉俳)’라 이름하여 기렸다는 점이 이런 심증을 더욱 굳게 한다.

도솔가를 근거로 유리왕 당시 불교가 이미 전래되었음을 기정화하고 생각하면, 신라의 가배에 뿌리를 둔 팔월추석은 자비와 지혜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즉, 풍요로운 계절인 8월 한가위를 맞이하며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이웃을 돌아보며 나눔을 실천하는 행사였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민족명절로 자리 잡았고 그 역사를 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겠다.

지금까지 더듬어본 가배의 유래는 2000년 전의 일이다. 가배는 심덕이 아름답고 고운 선조님들의 마음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빚어낸 송편과도 같은 명절이다.
그래서일까. 조상님의 음덕을 기리는 이때가 되면 떠오르는 보살님이 계시니 대비보살(大悲菩薩)이신 지장보살이시다. 도리천에서 서가여래의 부촉(咐囑)을 받으시고 석존께서 입멸하신 뒤부터 미륵불께서 출현하실 때까지 무불세계(無佛世界)에 몸을 육도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로서 매일 아침 항하사(恒河沙)의 정(定)에 들어 중생의 갖가지 근기를 관찰하신다 한다.
무엇보다도 명부세계의 중생을 위시한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심을 원으로 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에서는 보살님의 명호가 왜 지장인지에 대해 “그 여일하게 참으심이 대지와 같으시며, 고요하신 생각 깊고 비밀스러우심이 부모님의 그것과 같으시기로 지장이라 이름 하느니라(安忍不動猶如大地 靜慮深密猶如?藏).”하셨다.
또, 일설에는 지장보살께서 과거 인행시 장자의 딸로 태어나셨을 때의 행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세에 이른 그녀는 어느 날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발심하여 바라밀행을 실천코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 재산을 보시하였다. 누군가 더 줄 것이 없느냐고 하자 급기야 자신이 입고 있던 옷마저 보시한 뒤 몸을 땅 속에 감추셨다. 이로 인해 땅 ‘지(地)’와 감출 ‘장(藏)’을 써서 ‘지장’이라는 명호를 지니시게 되었다.”
이렇듯 고마우신 행업의 내용을 재 의식 가운데 하나인 <각배(各拜)> ‘대례청(大禮請)’의 가영(歌詠)으로 옮겨 기리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十九生來爲善女(십구생래위선녀)
열아홉살 아리땁고 곱디고운 아가씨가
脫衣入地號地藏(탈의입지호지장)
속옷주고 땅에드니 이름하여 지장이라.
冥間爲主度生願(명간위주도생원)
명부세계 주인으로 중생제도 원이심에
地獄門前淚萬行(지옥문전누만행)
지옥문앞 우시면서 갖은고생 마다않네.

단군 이래 최고의 풍요를 구가하는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풍요 가운데 빈곤은 정말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가배의 정신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성직자는 큰 나눔의 실천자

차제에 ‘성직자의 세금’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금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 또는 지방 공공 단체가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기 위하여 국민이나 주민으로부터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금전’이다. 그런데 성직자의 대사회적 역할은 국가 또는 지방 공공 단체도 하기 어려운 일 즉, 사회의 어둡고 그늘진 곳을 보듬고 어루만지는 일이다. 때문에 국가로부터 세금을 면제받는 것인데 이를 거부하고 양심선언이라도 하듯 세금을 내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성직자로서의 양심과 의무를 뒤로하고 스스로 이익단체의 일원임을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각 종교에는 자정기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스로의 부족하거나 잘못된 점을 찾아 바로잡아가며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성직자의 일원으로서 가을저녁 큰 나눔의 날인 가배를 맞이하며 우리 모두 회광반조(廻光返照)의 기회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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