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어떤 사람이 ‘지금 여기서’ 열반을 증득한다면 그 사람은 다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


  항하경(恒河經)

[원문]

(九四六)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時, 有異婆羅門來詣佛所, 恭敬問訊, 問訊已, 退坐一面, 白佛言: “瞿曇! 未來世當有幾佛?” 佛告婆羅門: “未來佛者, 如無量恒河沙.’ 爾時, 婆羅門作是念: 未來當有如無量恒河沙三藐三佛陀, 我當從彼修諸梵行. 爾時, 婆羅門聞佛所說, 歡喜隨喜, 從坐起去. 時, 婆羅門隨路思惟: 我今唯問沙門瞿曇未來諸佛, 不問過去. 即隨路還, 復問世尊: “云何? 瞿曇! 過去世時, 復有幾佛?” 佛告婆羅門: “過去世佛亦如無量恒河沙數.” 時, 婆羅門即作是念: 過去世中有無量恒河沙等諸佛世尊, 我曾不習近, 設復未來如無量恒河沙三藐三佛陀, 亦當不與習近娛樂, 我今當於沙門瞿曇所修行梵行. 即便合掌白佛言: “唯願聽我於正法․律出家修梵行.” 佛告婆羅門: “聽汝於正法․律出家修梵行, 得比丘分.” 爾時, 婆羅門即出家受具足. 出家已, 獨一靜處思惟: 所以善男子正信․非家․出家學道, 乃至得阿羅漢.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찾아와서 공경을 다하여 문안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구담이시여, 미래 세상에는 마땅히 몇 분의 부처님이 계십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미래 세상에 부처님은 항하의 모래와 같이 한량없다.”
그때 바라문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미래 세상에도 항하의 모래와 같이 한량없는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 正偏知)가 계실 것이라고 하니, 나는 그 부처님을 따라 모든 범행을 닦으리라.’
그때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그때 바라문이 길을 가다가 생각하였다. ‘나는 사문 구담에게 미래 세상의 모든 부처님에 대해서만 묻고 과거 세상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는 곧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세존께 다시 여쭈었다. “어떻습니까? 구담이시여, 과거 세상에는 또 몇 분의 부처님이 계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세상에도 항하의 모래와 같이 한량없는 부처님이 계셨느니라.”
그때 바라문은 다시 이렇게 생각하였다. ‘과거에도 항하의 모래와 같이 한량없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나는 일찍 한 번도 친근히 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가령 미래 세상에도 항하의 모래와 같이 한량없는 삼먁삼불타께서 계실 것이라 하더라도 가까이하고 좋아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부터 저 사문 구담의 곁에서 범행을 닦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곧바로 그는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원컨대 저는 바른 법과 계에 출가하여 범행을 닦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소서.”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의 바른 법과 계에 출가하여 범행을 닦고 비구가 되는 것을 허락하노라.”

그때 바라문은 즉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출가한 뒤에 혼자 고요한 곳에서 선남자가 바른 믿음으로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까닭을 생각하고 … 내지 … 아라한이 되었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34 제946경 <항하경(恒河經)>(T2, p.242a)이다. 이 경은 ≪별역잡아함경≫ 권16 제339경(T2, p.487b-c)의 내용과 비슷하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15:8 Gaṅgā-sutta(SN Ⅱ, pp.183-184)이다.

이 경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즉 어떤 바라문이 붓다로부터 과거 세상에 항하의 모래와 같이 한량없는 붓다가 계셨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 바라문은 한 번도 붓다를 친견하지 못했다. 만일 미래에도 항하의 모래와 같이 한량없는 붓다가 출현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붓다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바라문은 지금 당장 붓다의 바른 법(法)과 율(律)에 출가하여 범행(梵行)을 닦기로 결심하고, 붓다의 허락을 받아 출가하여 수행한 결과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잡아함경≫에는 “내지 아라한이 되었다.(乃至得阿羅漢.)”(T2, p.242a)고 끝맺고 있다. 그러나 ≪별역잡아함경≫에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佛說是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T2, p.487b)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별역잡아함경≫에 묘사된 부분을 ≪잡아함경≫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한편 ≪잡아함경≫의 <항하경>은 붓다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머물고 계실 때, 어떤 바라문에게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상윳따 니까야≫의 <강가 숫따(Gaṅgā-sutta)>는 붓다께서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의 웰루와나(Veḷuvana, 竹林)에 머물고 계실 때, 어떤 브라흐마나(brāhmaṇa, 婆羅門)에게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항하경>에서는 어떤 바라문이 붓다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수행한 결과 아라한이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강가 숫따>에서는 어떤 바라문이 붓다의 설법을 듣고 삼보에 귀의하여 재가신자가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한역과 니까야에 기술된 내용이 다를 뿐만 아니라 다루고 있는 주제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면 <강가 숫따>에서는 어떻게 설해져 있는지 살펴보자.

1.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에 있는 웰루와나(Veḷuvana, 대나무 숲)에 머물고 계셨다.
2. 그때 어떤 바라문이 세존이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3. 한 곁에 앉은 그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 존자시여, 얼마나 많은 겁(劫, kappa)이 흘러갔고 지나갔습니까?”
4. “바라문이여, 참으로 많은 겁이 흘러갔고 지나갔다. ‘그것은 몇 겁이다. 그것은 몇 백겁이다. 그것은 몇 천겁이다 그것은 몇 십만 겁이다.’라고 헤아리기 어렵다.”
5. “고따마 존자시여,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6. “바라문이여, 그럴 수 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여기 강가 강은 흘러서 큰 바다에 이르는데, 그 사이에 있는 모래들을 가지고 ‘그것은 몇 개이다. 그것은 몇 백 개다. 그것은 몇 천 개다. 그것은 몇 십만 개다.’라고 헤아리기 어렵다.
7.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참으로 많은 겁이 이미 흘러갔고 지나갔다. ‘그것은 몇 개다. 그것은 몇 백 개다. 그것은 몇 천 개다. 그것은 몇 십만 개다.’라고 헤아리기 어렵다.
8.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라문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9.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바라문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10.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훌륭하십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훌륭하십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듯이,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청신사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SN Ⅱ, pp.183-184)

위 경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강가 숫따>의 핵심은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며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N Ⅱ, p.184, “anamataggāyam brāhmaṇa sāṃsāro pubbakoṭi na paññāyati avijjāni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m sandhāvataṃ saṃsarataṃ.”)는 것이다. 이 <강가 숫따>는 ≪상윳따 니까야≫의 제15 <Anamatagga-saṃyutta(無始相應)>에 수록되어 있다. <아나마딱가 상윳따>의 주된 내용은 우주의 시작이나 윤회의 시작은 알려질 수 없고 무시(無始) 이래로 윤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뿍갈라 숫따(Puggala-sutta)>(SN15:10)에서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일 겁 동안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남긴 유골을 한 곳에 모아놓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웨뿔라(Vepulla) 산(pabbata)의 높이와 같을 것이다.”(SN Ⅱ, p.185)고 설했다. 웨뿔라 산은 라자가하에 있는 깃자꾸따(Gijjhakūṭa, 耆闍崛山)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붓다는 <뿍갈라 숫따>에서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바른 지혜로 보는 사람은 최대로 일곱 번만 더 윤회한 뒤에 모든 족쇄를 풀어서 괴로움을 끝낼 것이다.”(SN Ⅱ, pp.185-186)고 설했다. 여기서 일곱 번 윤회한다는 것은 예류과(預流果)를 얻은 성자가 죽은 후에 생존을 거듭하면서 늦어도 일곱 번째에는 열반에 든다는 뜻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항하경>의 핵심은 과거 세상에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붓다가 있었고, 미래 세상에도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붓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붓다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 출가하여 수행한 결과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강가 숫따>의 핵심은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겁을 윤회해 왔다. 그 까닭은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경은 모두 항하의 모래를 비유로 들고 있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상윳따 니까야≫의 <아나마딱가 상윳따>에서 설하고 있는 윤회는 ‘생사윤회설’이다. 생사윤회설이란 금생에서 내생으로 끝없이 윤회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생사윤회설은 초보자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누구나 내생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어야 금생에서 더 많은 죄악을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하루에도 수만 번 생사를 윤회하고 있다. 이러한 윤회설을 필자는 ‘일생윤회설’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마음은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을 반복한다. 실제로 인간은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삼계(三界)와 육도(六途)를 왕래한다. 여기서 말하는 삼계와 육도는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인간들의 정신세계를 편의상 여러 단계로 구분하였을 뿐이다. 이를테면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만 번 죽고 만 번 산다.(一日一夜, 萬死萬生)”라고 한 것은 일생윤회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윤회의 끝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수행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을 증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법열반이란 ‘지금 여기서[現世]’ 열반을 증득한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금 여기서’ 열반을 증득한다면, 그 사람은 다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마 성 <팔리문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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