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것을 비우려 할지언정 없는 바를 채우려 하지 않겠다”

연재를 시작하며

제방(諸方)을 행각(行脚)하다가 삭발본사인 조계산 선암사가 분규 위기에 처하여 십여 년간 소임을 산 것을 제외하고 한 평생을 간택참구(揀擇參究)에 사량(思量)을 다하다보니 책이라고는 자연히 조사어록(祖師語錄) 밖에 관심이 없어 자타의 언어 문자와 거리가 소원해진 것이 사실이다. 돈독한 수행자의 길에 들면 불립문자(不立文字),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등 문자에 대한 불신(不信)이 깊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말 이외의 종지(宗旨)를 말로 남긴 것이 우리 옛 어록이기에 이를 빌려 누구에겐가 이르고자 하는 우납(愚衲)의 마음 한켠의 변화로 우선 대 선지식 방 거사(龐居士, ?~ 808) 추모를 글로 쓰려 한다.

불교를 믿거나 불교에 관심을 지닌 대부분이 사부대중을 불교 내의 계급으로 여기고 선후를 가지거나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아 출가 승려를 직업 성직자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오늘날의 불교를 비추어 돌아볼 때, 방 거사를 조명하는 일은 시사 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사료된다.

승속을 비롯한 어떠한 조건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를 초월한 대표적인 인물로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방 거사에 대해 나의 좁은 소견이나마 피력하고자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 앞에 부처도 중생도 없다. 남녀노소도 귀천도 없이 평등하다. 일체중생실유불성. 불성만 있을 뿐이다. 태란습화(胎卵濕化)의 사생(四生)도 누구든지 노력하면 생로병사를 초탈하여 부처가 될 수 있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이 그 노력의 길이다. 자성(自性), ‘나’라는 성품을 직관(直觀)하여 확인하고 완전무결한 자아의 완성인 부처를 이루자는 것이다. 이에 승속(僧俗)이 다른 것은 달리는 경기와 비교할 수 있다.

출가자가 거침없이 달리는 경기를 하고 있다면 재가자는 장애물을 넘어 달리는 경기를 한다. 장애가 없다 해도 신심과 적극성이 없으면 느리거나 좌절할 것이고, 장애물이 있어도 철저한 신심으로 달리면 단순 달리기에서 낙오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방 거사는 아내와 아들, 딸을 가진 재가자였다. 그러나 방 거사의 가족은 다 같이 불퇴전(不退轉)하는 견고한 수행으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성취했다.

어느 날 석두(石頭)화상이 방 거사에게 물었다. 승(僧)으로 할 것인지 속(俗)으로 할 것인지 물으니 방 거사는 있는 그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또, 있는 것을 비우려 할지언정 없는 바를 채우려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중으로서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생사와 열반이다. 이는 비구(比丘)나 대처(帶妻)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분별이고 집착일 뿐이다. 머리 깎은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무단히 다음 생을 기약해 본다든지 인아상(人我相)에 집착하여 반조(返照)의 근원에 돌아가지 못하고 종단의 권위나 부귀, 명예에 자신을 허상에 매이게 하여 천금 같은 일생을 헛되이 소비하는 악도(惡道)의 두려움을 어찌할 수 없다.

승가 사회의 계율이 준수를 넘어서서 왜곡되어 인식되는 일은 오히려 형식적 가상을 일반화시킬 뿐이다. 반세기 전 종권(宗權)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법난이 오늘의 불교 피폐를 가져온 것을 돌아보고 지금의 선 자리에서 돈오와 각성에 생(生)을 바쳐 몰두할 일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는 일이다. 삼학의 어느 한 곳에 치중하면 복(福)이나 선은 될지언정 견성성불의 큰일을 마치지는 못한다. 계율은 집터를 닦는 일이요, 선정은 건축 재료를 장만하는 일이요, 지혜는 건축기술자인 목수와 같다. 이 셋이 일치되어야 집을 완성할 수 있다. 집터만 닦다가 일생을 보낸다든지 건축 재료만 모으다가 만다든지 하면 무의미하다.
집터가 빈약하고 건축 재료가 시원치 않더라도 건축기술이 능란하면 예술적 가치가 있는 집을 지을 수 있다.

그 예술적 가치의 기술이 바로 무루조사선(無漏祖師禪)의 돈오점수(頓悟漸修)이고 오후수증(悟後修證)이다. 망념(妄念)을 뒤집어보니 바로 진여(眞如)라는 것이다. 미오(迷悟)는 진여가 어두워 망념을 따라갔으나 깨치고 보니 망념을 깨달아 진여에 돌아가 진여와 망념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회광반조(廻光返照)한다.
색에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심(心)에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쫓아오니 어서 집을 잘 지어 자기 자신의 귀중한 부처를 잘 모셔야 되지 않겠는가.
방 거사도 이루었는데 우리라고 못할 일은 아니다.

 방 거사의 생애

방 거사가 언제 출생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간략히 살펴보면 그는 당나라 사람으로 808년에 이르러 입적하셨으니 이는 우리나라로 보면 신라시대에 해당한다.

거사의 이름은 온(蘊), 성장한 뒤의 자(字)는 도현(道玄)이다. 그는 현재 중국 호북성(湖北城)에 해당하는 형주(衡州) 형양(衡陽) 출신이다. 아버지는 형양 지방의 태수였고 성남(城南)에 살면서 집의 서쪽에 암자를 짓고 수행했다.

▲ 방 거사(그림의 일부분). 일본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여러 해가 지난 뒤 가족 모두가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가 지냈던 암자가 지금의 오공암(悟空庵)이다.
나중에 오공암의 아래 쪽 옛 집을 절로 희사한 것이 지금의 능인사(能仁寺)이다. 당나라 정원연간(785~804)에 자신의 전 재산에 비견되는 보배를 배에 싣고 동정호(洞庭湖)의 상류에 수장해 버렸다.

그는 바람에 뜬 낙엽처럼 무소유(無所有)로 수행에만 전력했는데 보시바라밀이란 무릇 받은 자는 받았다는 생각이 없고 준 이는 주었다는 생각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공(空)의 돌아갈 길을 삼았던 것이다.

방 거사에게는 아내와 1남 1녀가 있었는데 일부러 가산을 물속에 버려 처분하고 대를 깎아 조리와 바구니를 만들어 팔아 그날 그날의 생활을 영위했다. 부유는 나태(懶怠)와 희로애락의 산란(散亂)이 유발되므로 정진에 장애가 되고, 가난은 행주좌와 어묵정동(行住坐臥 語默動靜) 간의 공부가 향상되는데 지극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당나라 정원연간에는 선종(禪宗)인 대승선(大乘禪), 여래선(如來禪), 율종(律宗)이 융성하였고 새로 조사선(祖師禪)이 번영하여 천하를 휩쓸고 있었다. 방 거사는 어느 날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1) 선사를 찾아가 참학(參學)한 뒤 마조(馬祖) 화상을 알현하고 본래의 마음을 스스로 깨쳤다. 이에 사사(事事)에 현오(玄奧)를 다하고 도와 계합(契合)되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제방에 나아가 두루 선지식을 찾아 거량했다. 이 기록은 <선문염송(禪門拈頌)>과 <벽암록(碧巖錄)>에 있는데 이는 거사로서는 유일하게 조사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

거사가 입멸(入滅)하려 할 때, 딸 영조에게 이르기를 “모든 것은 환상의 변화요 실체가 없는 것이다. 네가 하기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느니라. 밖에 나가 한 낮에 해가 높이 떠 있으면 알려주거라”라고 하였다. 영조가 “벌써 한 낮입니다. 그런데 일식(日蝕)입니다. 나와 보십시오.” 하였다.
거사가 “설마, 그럴 리가 있느냐” 하고 일어나 밖에 나가 보았다. 그 사이 딸 영조가 거사의 자리에 올라 가부좌한 채 열반했다. 거사가 방에 돌아와 영조의 모습을 보고 “내 딸이 재주가 빠르구나.”하고 나무를 모아 다비(茶毘) 하였다.

그 후 7일이 지나 절도사이자 자사(刺史)였던 우적(于적)이 거사에게 문안을 왔다. 거사가 우공(于公)의 무릎에 손을 얹고 바라보며 “아무쪼록 일체의 존재는 비어있고 없다고 관(觀)하고 결코 일체가 실제로 있다고 보지 마시오. 몸 성히 잘 계시오. 모든 것은 그림자요 메아리와 같은 것이오.” 하고 말을 마쳤다. 그러자 말할 수 없이 미묘한 향 내음이 방에 가득하고 거사는 단정한 모습으로 깊은 선정에 잠겨 숨을 거두었다. 시체를 태워 그 재를 강이나 호수에 버리라는 그의 유언대로 여법하게 다비했다.

우공이 사람을 보내 방 거사 부인에게 알리니 부인이 말하기를 “바보 딸과 미련한 늙은이가 간다는 말도 없이 갔구나!”하고 아들을 찾아갔다. 화전(火田)을 일구던 아들이 어머니의 말을 듣고 삽을 놓은 후 “예!”하고 선 채로 가버렸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쩌면 애비나 자식이나 이다지 어리석은가”하고 다비하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방 거사의 부인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내가 없으면 간 줄 아십시오”라고 말한 뒤 자취마저 없어졌으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방 거사는 평소 말하기를 “아들이 있어도 장가들지 않고 딸이 있어도 시집보내지 않았도다. 온 집안이 화목하게 함께 무생(無生)의 노래를 나누었네” 하였고, 사람들은 방 거사를 가리켜 비야(毘耶)의 유마거사(維摩居士)가 다시 왔다고 하였다.

방거사의 위 일화에서 보이듯 그의 생애와 어록은 그가 진솔하면서도 소탈하였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재가자로서의 이상적인 선수행의 척도를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방 거사의 법거래(法去來)

방 거사는 승속에 얽매이지 않고 선법을 닦았는데 그의 어록이 <벽암록>에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방 거사가 약산유엄(藥山惟儼, 745~828) 선사를 만나고 하직할 때 10명의 선객들이 산문 밖까지 전송하고자 함으로 함께 나가다가 방 거사가 펄펄 내리는 눈을 가리키며 “좋은 눈이로다. 송이 송이가 딴 곳에 떨어지지 않는구나.”하였다. 그 때 전(全)이라는 선객이 “어디에 떨어집니까?” 하니 거사가 전 선객을 한 번 때렸다. 이에 전 선객이 “거사는 풀잎같이 가볍게 하지 마시오.”라고 응수하였다. 거사가 말하기를 “그대는 그러고도 선객이라 하는가? 염라대왕이 그대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전 선객이 “거사는 어떠시오?”라고 하자 거사는 다시 한 번 때리며 “눈으로 보지만 소경이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벙어리 같구나.” 하였다.

   
 
  지허(指墟)스님은

1941년 전남 보성 벌교에서 출생. 1956년 순천 선암사에서 만우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 1959년 선암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수료하고 해인사 통도사 등 선방에서 정진. 1967년 선곡스님을 법사로 입실 건당. 선암사 주지, 태고종 중앙선원장, 선암사 선원장, 제 7~11대 중앙종회의원, 제 2대 원로회의 의원 등 종단의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현재 순천 금둔사 조실이며 제 4대 원로회의 의원,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원로회의 의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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