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려고 마음을 내면 그 마음을 물러나게 하지 말라. 이것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다”

 고봉국사가 대중을 향하여 불자(拂子)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대중아, 이것이 선불장이니라. 마음이 비어 급제해 돌아가는 것이니 영리한 놈이 이 속을 향해보면 문득 방 거사의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보며 자기의 안심입명처를 보았으면 이 속을 향하여 주장을 분질러 바랑을 높이 걸고 토굴에서 쌀 없는 밥을 먹으며 젖지 않는 국을 마시고 다리를 펴고 잠을 이루어 소요하는데 방해되지 않거니와 종과 주인을 가리지 못하고 콩과 보리를 가리지 못하면 본분화두(本分話頭)를 들어 모든 사람으로부터 모양을 의지해 고양이 새끼를 그려가게 하리라.”

고봉화상은 선수행(禪修行)에서 대오(大悟)한 입증(立證)의 실상을 방 거사처럼 적나라하게 보인 예가 드물다는 것을 밝혔다. ‘일체중생 실유불성’을 확실하게 드러내어 차별 없는 본자심성(本自心性)을 가르쳐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를 알게 한 것이다.

수행공부란 먼저 이 몸의 육근육식(六根六識)과 사대오온(四大五蘊),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을 모두 녹여 한낱 의단(疑團)인 화두를 지어 눈앞에 두는 것이다. 화두를 의심치 않아도 의심이 되면 그 때부터 공부의 시작이다. 일상생활의 어떤 곳에서도 일거일동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관계없이 화두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해지면 그때가 공부에 힘 얻는 시절이다.

공부하려고 마음을 내면 그 마음을 물러나게 하지 말라. 이것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다. 화두를 의심해오고 의심해가면 평생 어느 때에 이르러 깨침을 얻는다. 절름거리는 자라도 천리를 가고 바다 속 눈 먼 거북도 우연히 구멍 뚫린 나무토막을 만난다. 악취 가운데 있어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함이 없으며 귀신의 왕을 만나도, 염라대왕을 만나도 화두일념하면 오히려 그들이 고개 숙인다.

젊은 딸이 방 거사 열반 시에 방 거사 자리에 앉아 딸이 먼저 열반을 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어머니 전달을 듣고 선 채로 할(喝)을 하고 숨을 그쳐도, 아무 근심도 두려움도 슬픔도 없는 것은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기 때문이다. 시방세계 어디를 가도 즐겁고 편안할 뿐이다.

 화두선(話頭禪)과 조사선(祖師禪)

화두선(話頭禪)은 화두를 참구하는 선을 말하고 조사선(祖師禪)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의 머리이니 고칙(古則) 또는 공안(公案)을 참구하여 닦는 수행이다. 고칙은 옛 스님의 기본이 되는 법칙이고 공안은 관공서에 표준이 되는 문서로 공정하여 위반이 되면 안 되는 법령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달마스님으로부터 은밀히 중국에 비롯되어 6조를 지나 석두(石頭)와 마조(馬祖)스님 이후 만연하였다. 선(禪)은 인도에서는 선나(禪那)라 하고 중국에 와서 줄여서 ‘선’이라고 했고 사유수(思惟修), 정려(靜慮)라고도 했다. 이는 정혜(定慧)의 통칭이다.
사유를 닦아나가거나 고요한 마음을 선이라 하고 선정에 의한 지혜를 얻으려 하는데는 자연히 깊고 얕음이 있다. 이 심천(深淺)의 다름을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선사는 5종선이라 정리했다.

우주에는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가 있는데 이를 삼계(三界)라 한다. 욕계는 식욕, 음욕, 수면욕이 있는 세계이다. 외도선(外道禪)은 색계와 무색계를 좋아하고 욕계를 싫어한다.

범부선(凡夫禪)은 인과(因果)를 믿지만 인과 중에 싫고 좋은 것을 구별한다.
소승선(小乘禪)은 아공(我空)을 닦아 편협한 진리를 소유한다.
대승선(大乘禪)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닦는다.

최상승선(最上乘禪)은 자심(自心)이 청정하여 본래 번뇌가 없으며 자기 마음에 완전무결한 무루지(無漏智)가 구족하여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달아 얻는 선이다. 최상승선은 다시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으로 나뉘어진다.

여래선은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으로 <능가경>에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므로 문자의 알음알이인 이(理)에 떨어져 달마대사가 말한 진선미(眞善美)에 미치지 못한다. 조사선은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달마대사가 본래 전한 선법이다. 여래선은 교내(敎內)에서 다 마치지 못한 원천을 닦는 선이라면 조사선은 교외(敎外)에 별전(別傳)하는 지극한 선이다.

앙산(仰山)대사가 향엄(香嚴)스님에게 “사제의 요사이 견처(見處)가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향엄스님이 “내가 갑자기 말할 수 없습니다.”하고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去年貧末是貧(거년빈말시빈)
今年貧始是貧(금년빈시시빈)
去年無卓錐之地(거년무탁추지지)
今年錐也無(금년추야무)

지난해 가난은 가난도 아니고
금년 가난이 참 가난이라.
지난해 가난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는데
금년 가난은 송곳조차 없구나.

이에 앙산대사가 “그대가 여래선은 얻었으나 조사선은 얻지 못했네 그려”하였다.

여래선은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고 조사선은 없는 것에서 없는 그것을 찾는 것이다. 앙산대사가 향엄스님에 요구한 견처인 조사선을 이룰 줄 알아야 비로소 바른 수행자로서 무루대오(無漏大悟)에 남김이 없다 하겠다. 사람들은 이를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나 해보지 않은 것 때문에 어렵다. 방 거사의 딸 영조처럼 쉽지도 어렵지도 않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구나 100년이 다 못되어 어디로 간 줄 모르게 떠나는 허무한 인생인데 온 곳이 어디고 갈 곳이 또한 어딘지 천지만물 중에 누가 주인인지 알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알고 사는 길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 가르쳤고 낱낱이 그 실행의 얻은 바를 가르쳐 준 분들이 조사스님들이다. 오늘을 사는 나 라는 스스로가 귀중하고 같이 사는 처, 자식, 부모, 형제와 모든 가까운 사람들도 다 귀중하다. 귀중하기에 그 귀중한 값을 나도 갖고 처자식과 부모형제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갖게 하자는 것이 불교요, 선(禪)이다.

선은 바로 직선으로 가자는 것이고 그중에 특히 조사선은 초특급이고 교(敎)는 중생의 근기를 따라 돌아가자는 것이다. 포기하고 허무하게 살기로 작정했으면 몰라도 인생이 바쁜데 언제 돌아가겠는가. 바로 가도 늦지 않는가. 조리장사, 바구니 장사, 방 거사 가족도 초특급을 타고 갔는데 우리라고 못 갈 일이 없다.

쉽기로 말하자면 마당 쓸다 기왓장이 대마디에 맞아 난 딱 소리에 깨치고, 복숭아꽃 피는 것을 보고 깨치며, 자다가 옆 사람 목침에서 머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치고, 고개를 넘다 돌에 발이 걸려 피나는 것을 실지로 보고 깨친 우리 조사스님들의 기록이 여실하게 있다.

방 거사 가족처럼 현실 그대로, 먹고 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안으로 마음을 다잡고 고요함을 찾아 얻으면 되는 것이 참선이다. 10년, 20년 참선해도 깨치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갖추어 있는 불성(佛性)을 바로 보지 못하고 혼침(昏沈)이라는 어두움에 빠지거나 도거(掉擧)라는 어지러움에 밀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좌선하며 좌복에 앉아 있어도 혼침과 도거에 시간을 보내다 보면 효과를 얻지 못한다.
참선하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무기가 셋이 있다.

첫째 대신심(大信心)이다. 깨달음을 믿는 것이 불심(佛心)이고 그 불성이 나에게 있으니 나는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 대신심이다.
둘째 대분심(大憤心)이다. 아침마다 예불하는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천이백 대아라한과 부처님 이래 무수한 조사들과 선지식이 있는데 왜 나는 깨치지 못하는가 하는 분한 마음을 스스로 내어 채찍질 하는 것이다.
셋째 대의심(大疑心)이다. 우리는 본래 의심하는 마음이 있다. 의심 중에는 큰 의심이 있고 작은 의심이 있다. 작은 의심을 푸는 것은 바다에서 멸치를 잡는 어부요, 큰 의심을 푸는 것은 큰 바다에 나가 고래를 잡는 어부다. 큰 의심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해결하는 일이다.

‘부모미생전소식(父母未生前消息)’과 ‘천지미분전소식(天地未分前消息)’, ‘이 몸 끌고 다니는 주인이 누구인가’와 ‘이뭣꼬’,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등등 1700 공안(公案) 즉 화두이다. 이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틀림없는 해결의 큰 의심이다. 졸병을 잡으면 전쟁이 계속되지만 장수를 잡아야 승리를 하고 평화가 온다.

방 거사 가족은 화목하고 평화롭게 이 문제를 멋지게 해결했다.
10년, 20년 세상 인연을 끊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화두전념 했으나 견성(見性)마저도 못한 수행자들이 있다. 이들은 위의 세 가지를 해결하는 노력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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