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믿는 목적은 견성성불에 있는 것이지 하찮은 탐욕이나 채워주는 어리석음에 있지 않아

<금강경 오가해>의 야부도천(冶父道川) 스님은 주인의 눈으로 본 것을 노래로 지어 읊었다. 야부도천 스님은 중국 송나라 시기의 스님으로 부대사보다 630년 후세 사람이다. 선사는 세존이 공양을 마치고 옷과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를 펴고 가부좌하고 앉으셨다는 구절에 송하기를 “성성착(惺惺着)하라!” 하셨다. <금강경>을 읽는 사람에게 “깨어있고 깨어 있으라”고 준엄하게 이른 후 다음과 같이 송했다.

飯食訖兮洗足已(반식흘혜세족이)
敷座坐來誰共委(부좌좌래수공위)
向下文長知不知(향하문장지부지)
看看平地波濤起(간간평지파도기)

밥을 드시고 발을 씻으신 뒤
가부좌 하신 것 누가 같이 할까.
내려보고 향하는 긴 글 아는가 모르는가
보고 또 보면 평지에 파도가 일어남이다.

이 시를 음미해 보자면 부처님이 밥을 드신 일, 발을 씻은 일, 가부좌 하신 일은 모두 일상 생활의 지극히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밥을 드신 일은 일상을 통하여 주인의 지혜를 보여 준 것이고, 발을 씻은 일은 주인이 지혜를 통해 해탈을 보여준 것이며, 가부좌하신 것은 주인이 적멸을 통해 큰 깨달음의 즐거움을 보인 것이다. 이를 누가 같이 할 것인가. <금강경>을 보고 <금강경>의 긴 글에 든 심오한 뜻을 어느 누가 알 것인가. 오로지 부처만이 부처를 알아 볼 뿐이다.

부처가 누군가. 자신의 주인이 바로 부처다. 내 안에 있는 주인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 불성(佛性)이고 자성(自性)이며 주인공(主人公)이자 본래(本來) 부처이다. 부처님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깨달음이 없었으나 출현 이후 깨달음을 가르치니 중생과 부처가 생겼다. 이것이 바로 평지에 파도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말 이전에는 글자도 없었고, 글자가 없으면 <금강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경을 잘 보는 것도 보지 못하는 것도 없음이 평지요, 말을 할 줄 알고 글이 만들어져서 부처로부터 <금강경>이 생긴 것이 풍파이다. 이를 ‘천지미분전소식(天地未分前消息)’이라 하고 ‘언전소식(言銓消息)’이라고 한다.

그러나 <금강경>을 보고 또 보아 깨달음을 얻어 부처자리에 오르고 나면 부처의 분상에서는 <금강경>도 부처도 모두 소용없는 것이다. 그 소용없는 <금강경>이 오히려 평지에 풍파를 일으킨다. 강을 건너게 한 다리는 강을 건넌 후 아무 소용이 없다. 중생을 깨치게 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49년 설하신 팔만대장경인데 모두가 깨쳐서 한 중생이라도 없어지고 모두가 부처가 된다면 부처도 없고 부처라 할 이름조차 없기에 쓸 데 없는 일이라는 것이 평지풍파라는 야부(冶父)스님의 뜻이다.

범부들은 봐도 모르고 지나치는 <금강경> 한 대목이 어떻게 이리 다를 수 있는가. 경을 읽다가 이와 같이 깨달아 알면 도인의 견해와 우리가 지나쳐버린 중생의 우치가 다른 것도 같아진다. 모르다가 그에 대한 다른 것을 알게 되니 즐겁기 그지없다. 알아서 즐겁다보면 그 깨침 또한 부처님께서 일으킨 평지풍파이며 나 역시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평지에 돌아가 대오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 생각 돌이켜 주인으로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보면 자성이 오직 하나로 돌아가 새로운 세상을 연다. 새 세상에는 생멸(生滅)이 없다. 이를 깨달음의 세계라 하고 불국토라 한다. 한 생각 돌이키면 주인이 보이고 한 생각 돌이키지 못하면 주인을 잃은 채 색성향미촉법의 노예가 되어 제각기 가짜 주인 노릇을 하다가 허공에 연기처럼 사라진다.

죽은 주인 앞에 산해진미를 차려 놓으면 무슨 소용인가. 주인이 주인인줄 모른 채 잘 먹고 잘 놀며 해가 가고 달이 간 뒤 칠흑같이 어두운 낭떠러지 죽음에 이르면 허무하고 허무하지 않은가. 이것이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요,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의 허무한 인생이다.

<금강경>의 ‘부처님이 밥을 먹고 밥그릇을 정리하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가부좌하고 앉았다’는 행동이 우리에게는 이상할 것 없이 지나간다. 부처님과 우리의 일상생활이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싶다. 그러나 주인이 하는 평범한 일상생활과 주인을 잃은 사람의 일상생활은 하늘과 땅 사이처럼 큰 격차가 있다.

우리에게 주인이 엄연히 있지만 나에게 있는 그 주인을 보지 못하니 이를 돌이켜 얻자는 것이 <금강경>이다. 그리고 <금강경>의 한 대목 한 대목마다 부대사, 육조혜능, 규봉종밀, 종경, 야부가 각각 독특한 자기 견해를 가지고 해석하였지만 이 모두가 엇갈리는 바가 없어 천개의 강물이 하나의 바다로 모이는 듯하다.

<금강경>에서 엿볼 수 있듯, 부처님은 어렵지 않고 쉽게 풀어서 설법하셨다. 일체중생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문(門)이 넓고 크기 때문이다. 부처님 말씀은 활과 같고 조사스님 말씀은 화살과 같다 한다. 활은 둥글고 활줄이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도 하지만 화살은 곧으며 그 끝은 예리하다. 부처님 말씀은 부드럽고 쉽기에 누구든 접할 수 있지만 조사스님 말씀은 허공을 가르고 표적에 적중해야 하므로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내면에 엄연히 존재하는 주인을 모르고 사는 중생에게 주인을 파악하게 하기 위해서는 활과 화살이 다 있어야 한다. 화살의 모체는 활이며 그 활은 화살을 날리기 위해 있다. 부처님 말씀만 알아듣고 조사 스님 말씀은 알아듣지 못하면 수박의 껍질만 보고 수박의 달고 시원한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활과 화살이 모두 있어야 견성성불(見性成佛)과 활연개오(豁然開悟)의 과녁을 적중할 수 있는 것이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는 일체(一體)라 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교설(敎說)한 법에 있고 그 법은 역대조사가 역력히 실행하였기에 승(僧)이 있다. 이 삼보는 시방(十方)에 상주(常住)한다. 우주만유에 활활자재(活活自在)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살아있고 살아있는 실존(實存)의 정체(正體)라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귀의(歸依)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말로만 귀의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다해 귀의해야 하고, 몸과 마음을 다해 귀의하려면 부처님 말씀과 조사스님 말씀을 알아들어야만 참수행으로 견성성불에 이른다.

불교를 믿는 목적은 견성성불에 있는 것이지 하찮은 탐욕이나 채워주는 어리석음에 있지 않다. 탐욕은 암암리에 큰 뜻을 저해하기 위해 자라난다. 작은 물욕은 큰 물욕으로, 작은 명예는 큰 명예로, 작은 게으름은 큰 게으름으로, 작은 부귀는 큰 부귀로 자란다. 이에 지혜의 눈으로 탐진치의 무명을 관찰하고 저지해 말살해야 한다. 방거사는 자신의 전 재산을 동정호에 빠트려 탐진치의 무명을 비웠고 부대사는 날품팔이 하며 정진했다.

탐욕이 암암리에 크게 자라나는 것처럼 작은 수행도 조금씩 자라나서 큰 수행이 되고 큰 수행은 마침내 견성(見性)의 결과에 이른다. 견성은 자기 안에 있는 참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고 성불은 참 주인이 완전무결한 우주 만유의 주인 되는 것을 말한다.

주인이 된 부대사의 멋진 시(詩) 하나를 들어보기로 하자.

夜夜抱佛眠(야야포불면)
朝朝還共起(조조환공기)
欲識佛去處(욕식불거처)
只這語聲是(지자어성시)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네.
부처의 간 곳을 알고 싶은가
다만 이 말소리에 있다네.

밤에 자는 것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함께 하며 말하고 오고 가는 일거수일투족에 참 주인 부처가 있다. 부대사 뿐 아니라 두 아들과 아내 역시 참 주인을 알아 밤에는 함께 정진하고 낮에는 남의 집에서 품팔이하면서도 참 주인과 함께하니 즐거워 노래가 나오는 것이다.

부대사는 24세가 되던 해, 인도 출신의 숭두타(嵩頭陀)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부대사를 보고 “너와 내가 과거 비바시불(毘婆尸佛)이 있는 곳에서 동시발심(同時發心)하였다. 도솔천에 가사와 발우가 있으니 언제 돌아갈 것이냐” 고 했다 한다. 비바시불이란 과거칠불 중 최초의 부처님이며 삼천제불의 최초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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