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은 삶 전 과정의 연속선에서 이해돼야 하며 결국 선행과 좋은 업보를 쌓아가는 것...불교 교의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고통 극복할 수 있는 ‘웰다잉 교육’ 시급

 

강릉 록유사 주지 성인스님은 8월 17일 가톨릭관동대학교 일반대학원 2017년도 학위수여식에서 노인복지 전공으로 사회복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불교신도의 신앙이 죽음불안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이다.
성인스님의 이번 박사 논문은 불교계에서는 ‘웰다잉’ ‘호스피스’ 등에서 미개척 분야를 연구했다는 점에서 선도적 역할을 기대 할 만하며, 후속 연구에 유익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불교계 웰다잉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 죽음 준비교육과 호스티스 서비스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인구의 15.5~24%를 차지하는 불교 인구와 전통종교로서 불교의 문화적 영향력을 중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인스님의‘불교신도의 신앙이 죽음불안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박사논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한국은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속도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급증하는 노인인구와 더불어 노인빈곤, 건강, 주거복지, 노인범죄 등 다양한 노인 문제들이 사회적 관심사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노인인구들이 겪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 가운데 죽음에 대한 불안, 고독사, 연명치료와 ‘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 문제 등이 새로운 정책적 관심 사안으로 대두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7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시행을 앞두고 호스피스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 노인복지계를 중심으로 간호학, 호스피스학계와 더불어 웰다잉교육, 죽음준비교육, 호스피스 완화의료 인력양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노진섭, 2015).
사회복지적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의 의미는 단지 고통과 절망, 허무한 종결 과정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전체적인 삶을 정리하고 아름답게 마감하는 자세와 남겨진 가족, 그리고 사회 모두에 보람이 되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행한 죽음이 아니라 ‘좋은 죽음’ 즉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실천적 개입은 삶의 주기에서 발생되는 사회적 위기와 불행을 감소시키고 예방하는 사회복지학의 연구 및 실천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불교계에서는 웰다잉과 불교호스피스 서비스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불교계의 관심아래 2009년 한국불교호스피스협회가 창립되었다.
불교호스피스 전문가들은 현대사회 웰다잉 욕구에 대응하여 불교의 기본 가르침을 현대사회의 욕구에 맞춤형으로 풀이하여 불교적 명상과 호스피스 서비스를 연계하는 방식의 웰다잉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불교 웰다잉 교육의 출발은 호스피스 치료와 함께 정서적 지원을 통한 죽음 준비가 필요하다는 데서 나왔다.

세계적인 완화치료 전문가인 데이비드 쿨 박사는 자신의 저서 『웰다잉』 (2005)에서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이 겪는 육체적인 고통은 모르핀 등의 약물로 완화시킬 수 있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어떤 약물로도 치료할 수 없다. 그 고통으로 인해 평생을 지켜온 인간다움은 사라지고 그를 지켜보는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경우를 종종 봐 왔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웰다잉은 웰빙, 즉 삶을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 라는 문제와 동전의 양면으로 죽음에 대한 준비와 정서적 대비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웰다잉 교육과 웰다잉을 위한 사회복지적 개입을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의미와 태도, 죽음의 단계, 죽음 이후의 사별과 애도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 되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우리나라 말기환자나 노인의 웰다잉을 위한 죽음준비프로그램, 삶의 끝 돌봄, 호스피스 등의 사회복지서비스나 정책이 제도적으로 완비되고 증진될 수 있다.

본 연구는 특히 우리나라 전통종교로서 불교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관점을 살펴보고 불교신도들이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죽음인식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웰다잉에 대한 사회복지적제도와 실천적 개입의 함의와 전력을 도출하려고 한다. 불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윤회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은 단지 고통과 허무의 종말이 아니라 삶을 더욱 윤택하고 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인식된다.

죽음에 대한 불교의 이러한 관점은 웰다잉과 불교호스피스 복지 서비스를 위한 실천적 전략과 기술을 개발하는데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다. 특히 급속한 고령화와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사회적 불안요인들로 인하여 웰다잉 교육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우리나라의 문화적 및 종교적 특성에 맞는 교육프로그램과 개입기술이 필요하다.

불교의 사유는 일간 생로병사(生老病死), 즉 삶과 죽음의 고통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싯다르타가 출가를 결심한 것은 삶과 죽음의 고통을 직시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죽음과 허무의 조건이 되는 삶의 문제를 찾게 되며 이는 결국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착된다. 즉 불교는 생과 사를 하나의 연결된 계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 따르면 인간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집착에서 비롯된다. 즉 세상에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러한 헛된 것에 집착하는 것이 생로병사, 즉 삶의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의 생명과 죽음의 경계는 5온(五蘊)과 6입(六入)의 출현과 소멸이 되며, 아비달마에서는 이를 토대로 하여 명근(命根)의 출현과 소멸, 그리고 수명(壽命)과 따뜻한 온기(溫氣)와 의식이 생사의 기준이 된다. 인간의 육체는 이러한 오온의 결합으로 인식되며 죽음은 이들의 해체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대승불교 업(業)과 식(識), 그리고 명근(命根)이 생사의 경계를 나누는 잣대가 되었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의 전개 과정에 나타난 생명에 대한 이해는 ①오온(五蘊)과 육입(六入) ②명근(命根) ③식(識)으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생명관은 연기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불교의 연기론적 생명관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생물학적 • 의학적 관점에서의 생명과 윤회론적 관점에서의 생명의 의미가 복합적으로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즉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생물학적 • 의학적 과정과 윤회의 발생에서 소멸까지의 종교적 • 초월적 과정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한 존재의 죽음은 곧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태어난다는 것은 곧 죽음의 과정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사람은 이처럼 여러 세계를 돌아다니는 존재이며 생과 사를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이다(윤호진, 1997).

불교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세로부터 윤회를 설명한다. 즉 구체적으로 생 • 노 • 병 • 사 4고와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고통) •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 구부득고(求不得苦, 생각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고통) • 오온성고(五蘊盛苦, 자기중심적 집착서 생기는 고통)를 합한 8고가 현세의 삶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의 뿌리는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5온 즉 갈애로부터 형성된다.
집성제는 고통의 원인을 이 갈애로 인식한다. 갈애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을 뜻하며 12연기 윤회의 사슬의 원인이 된다. 12연기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 갈애)→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십이지(十二支)로 이루어진 윤회의 사슬이며 이들 과정을 정확이 관찰하면 집성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행으로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12연기는 한 생명체의 성장과정 뿐만 아니라 전생, 현생, 내생의 삼세윤회의 과정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생명 자체의 전개과정에 대한 도식이다. 즉 무명과 행은 생사윤회의 근본 원인으로서 전생에 지은 번뇌와 행위를 의미한다. 현재의 생명은 과거에 지은 무명과 행의 결과로써 나타난 것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이다. 식에서 유까지의 8단계는 수태와 출산 그리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모든 업을 짓는 단계로서 인간의 삶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이러한 업의 결과 자신이 태어날 곳이 정해지는데 그것이 생이다. 미래의 생으로 인해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이 노사(老死)이다. 이처럼 불교의 사생관은 연기론적인 생명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전생, 현생, 내생의 연속적•의존적 인과관계에 의해서 인간의 삶이 규정된다. 12지연기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 이루어지는 생애주기적 관점과 윤회의 발생에서 소멸까지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즉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생명현상과 이를 초월한 영적인 순환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생사일여의 관점은 어디까지가 생이고 어디서부터 죽음인지에 대한 경계조차 그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연기의 산물이고 그 속에는 사실 실체라고 규정할 만한 어떤 존재도 없으며 삶의 현상을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곧 무명의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윤종갑, 2010).

   
▲ 성인스님은 불교교의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불교적인 웰다잉 교육이 널리 확산돼야 한다고 논문에서 강조했다. 사진은 백중날 조상영가의 천도재를 봉행하고 있는 한 사찰의 모습.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고통과 괴로움의 생명윤회를 벗어나 종교적 완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즉 불교가 제시하고 있는 열반의 길은 무엇인가? 선정과 위빠사나를 수행하다 보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가 오는데, 무명이 완전히 없어진 이 경지가 멸성제이다. 도성제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정견(正見) • 정사유(正思惟)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 • 정념(正念) • 정정진(正精進) • 정정(正定)의 팔정도를 제시한다.

윤회는 3계, 또는 6도를 통해서 끊임없이 전개되는데 이러한 윤회의 계기를 결정하는 요인은 자신의 업(業)에 따른 결과로 인식된다. 현생의 삶에서 한 인간이 행하는 업 자체는 순간적인 것이지만 업력은 잠재적인 에너지로서 죽은 다음의 생에서 또다른 생명의 에너지로 역할하게 된다. 업은 반드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며 이것을 업보(業報), 또는 과보(果報)라고 한다. 여기서 업은 개인의 의지작용으로 생겨난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이러한 업보에는 초월적인 존재나 신의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없다. 어떤 영역에서 존재로 윤회하는 가는 철저한 자신의 업에 달려있게 된다. 선업이 많으면 천상계에서 태어나고 악업이 많으면 지옥계에서 태어난다. 만약 이러한 세계에서 업력이 소진되면 다시 윤회하게 된다. 오직 인간계에서 사람은 업을 쌓을 수 있으며 천상계를 포함한 다른 세계에서는 업력을 소진하게 된다. 따라서 업을 쌓을 수 있는 인간계에서의 삶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안옥선, 2006).

이처럼 삶이 주체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실천의 영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인식하는 죽음도 개인의 주체적인 문제로서 사유된다(부위훈, 2001).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의 동반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생명윤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의 육체마저도 죽음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자신의 깨달음만이 자신의 육체와 소유로부터 삶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열반에 대한 깨달음은 육체와 현세의 고통을 넘어서 죽음을 새로운 탄생으로 받아들이고 현세를 넘어서 영원한 윤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존재로 해탈하는 삶을 지향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운명을 단 한번의 생(生)으로만 끝나지 않는 사유(四有; 생유, 본유, 사유, 중유)사상을 바탕으로 윤회의 법칙을 설정하고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인간의 의식 기능을 14단계로 구분하여 생유(生有)의 마지막 의식인 사유(死有) 시 의식이 열네 번째 단계에 있으며 그 의식이 일어나는 순간 다음 생의 첫 번째 단계인 재생연결식과 닿아 있으므로 죽음의 순간을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생유(生有)시 탐심, 진심, 치심을 놓는 수행은 그러한 연속적이며 반복적인 윤회의 순환 고리를 이탈할 수 있는 원심력으로 작용해 해탈(解脫)을 향해 나가가는 나선(螺旋)의 구도를 만들어 생사의 초월에 다가가게 한다.

결국 불교의 죽음관은 삶과 죽음을 분리된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연기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지극히 주체적인 영역인 것이다. 불교의 윤회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나 영혼과는 매우 다르다. 즉 육체를 분리된 고정 불변하는 하나의 영혼이 다른 세계로 이탈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윤회설은 나비의 알이 애벌레로 변신하고 번데기-성체로 변신해 가는 것과 유사하다. 생명은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신하면서 삶을 윤회하는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별, 성별, 문화별, 종교별로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나타난다. 먼저 이지영 • 이가옥(2004)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인이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삶의 소멸로 죽음은 무(無), 죽음은 끝, 죽음은 자연현상 등으로 인식한다.
둘째, 죽음은 삶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힘든 삶으로부터의 쉼, 허무한 삶으로부터의 해방, 민망한 삶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셋째, 죽음은 삶의 연장으로 이승과 연결된 삶, 영원한 삶, 재생하는 삶으로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죽음이 갖는 의미는 수용에서부터 거부에 이르기까지 개인에 따라 매우 상이하게 나타난다. 특히 개인에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거나 부정하기도 하고, 자신의 죽음을 초월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권중돈, 2011).

선행연구들은 우리나라 노인들의 죽음인식은 서구사회의 죽음학이 강조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실존적인 관점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 등 전통종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많은 종교와 철학은 죽음을 사회적, 문화적, 영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웰다잉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초점은 죽음을 사회와 개인이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현재의 삶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며 죽음에 대한 가족들 고통과 상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비용도 경감될 수 있다. 즉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마지막 과정이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와 인식에 따라 죽음으로 생겨나는 많은 문제들이 예방되고 회피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죽음’과 고통을 교학의 출발점으로, 그리고 ‘죽음의 극복’을 교학의 종착점으로 삼고 있는 불교의 죽음관은 현대사회에서의 웰다잉에 대한 담론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불교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해석, 그리고 그 극복의 과정은 웰다잉에 대한 보도 풍부한 담론을 형성하는 단초가 되며, 특히 죽음의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극복을 육체적 • 생리적 영생으로서가 아닌 정신적 • 심리적 현상으로 해석하고 이러한 정신적 • 심리적 변화를 통한 사물의 진실상(眞實相)에 대한 깨달음을 통하여 죽음을 극복하는 불교의 견해는 죽음불안의 극복 및 죽음교육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

불교의 사생관은 단순히 ‘좋은 죽음’의 조건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교적 신념과 믿음, 계율을 실천하는 의지를 통해서 생명윤회를 끊고 열반을 성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죽음에 대한 관점은 죽음은 피하거나 두려워 할 것도 못되고 반대로 현실을 회피하여 서둘러 맞으려고 하거나 재촉할 것도 아닌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불교의 죽음과 관련한 교의와 죽음준비교육의 핵심개념인 ‘좋은 죽음’은 삶의 전 과정의 연속선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결국 선행과 좋은 업보를 쌓아 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죽음은 허무하고 무서운 사건이 아니라 자연의 업보에 따라 윤회하는 과정이므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삶에 초점을 맞추기만 하고 애써 외면하고 사는 듯 보이지만 정작 우리는 죽음에 대한 주의를 거둔 적이 없다. 죽음을 부정하는 행위는 자신을 부정하고 망각하는 것이며 중심 자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강릉지역 불교신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불교의 교의와 신앙이 신도들의 죽음인식과 죽음불안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조사 연구하였다. 조사결과 불교신앙정도에 있어서 응답자들의 평균값은 5점 척도 가운데 3.26으로 비교적 종교에 대한 충성심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불교지식 정도에 있어서는 응답자 평균값아 7점 척도 가운데 3.09로서 중간값 이하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표준편차 2.37로서 응답자 가운데 지식의 분포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불교에 대한 충성심과 불교 교리에 대한 지식은 일치되는 경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불교의 죽음에 관련한 교리가 일반인에게 다소 난해한 철학적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 볼 수 있다.

 

   
▲ 성인스님.
성인스님 약력

- 가톨릭관동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
- 가톨릭관동대학교 사회복지학 박사
- 총무원 문사부장, 삼척대 • 강릉대 평생교육원 강사,
   육군 특수훈련단 상임법사 등 역임
- 현재 사회복지법인 예당복지재단 대표이사,
- 강릉교도소 교화위원, 강릉 록유사 주지

<봉사활동>

  - 매주 토 강릉고속버스터미널 커피봉사
   - 매주 토 남대천 노숙자에 자장면 봉사
                                                    - 영동권 군부대 군장병 위문봉사
                                                    - 매년 영동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장학금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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