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무형은 일체 만물과 움직임에 낱낱이 담겨있기 때문에 모든것은 道 아닌것이 없다

방 거사가 당대의 대선지식 석두 화상을 찾아 자기가 구도한 첨예한 한마디를 던진 것은 속가에서 가족과 함께 철저한 수행으로 공부를 반조하여 안목이 열릴 무렵이었다. 일상생활은 평범한 모든 사람과 다를 바가 없으나 가지고 버리는 것에 애착하지 않고, 도의 높고 낮음과 명예에도 끄떡하지 않으며 의단독로(疑團獨露)가 심중에 철저하였다.

참선은 한가하게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도 지식도 아니며 발심해서 닦을 뿐이다. 방거사는 자기 구도가 얼마나 철저했으면 대선지식을 찾아갈 수 있었으며 어찌 대면하여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인가.

“만법과 짝하지 않는 벗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얼마나 예리한 칼날인가. 선지식이 반응할만한 정곡을 찔러야 이에 상응하는 반응도 있는 것이다. 이에 석두화상이 방거사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언전의 비밀이라 할 수 있다. 방거사는 석두화상의 이 행동에서 확연대오했다 한다. 열매가 익을 대로 익으면 작은 바람에도 떨어지는 법이다.

방거사는 석두화상에게 인가 받고 난 후 석두화상과 쌍벽을 이룬 당시의 대선지식 마조화상을 찾아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 마조스님의 답은 “네가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 바로 너에게 이르리라”였고 그 말을 들은 방거사가 언하에 문뜩 현묘한 대도를 깨치고 2년 동안 마조화상을 모시고 살았다.
인가를 받고 난 후 어느날 방거사가 마조화상에게 물었다. 인가를 받은 뒤에도 물음을 받거나 묻는 것은 법거래(法去來)를 더욱 원숙하게 한다.

“어둡지 않는 것이 본래인(本來人)이니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높은 곳에 안목을 두소서” 하니 마조화상이 곧바로 눈을 아래로 보았다. 거사가 다시 “일등 가는 몰현금(沒絃琴)이니 오직 스님만이 퉁기시어 오묘함을 얻으셨습니다.”하므로 마조화상은 다시 눈으로 위를 보았다. 방거사가 공손히 절을 하니 마조화상은 곧바로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방거사가 “좀전에는 기교를 놀리기에 옹졸하였습니다” 하였다.

방거사가 묻고 또 물어도 마조화상은 말 한마디 없이 위 아래로 눈을 두었다가 방장실로 가버린 것이 무슨 답인지 범인들은 알기 어려운 장면일 것이다. 도(道)는 말도 게송도 행동도 아니며 무한한 무형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다. 그러나 무한한 무형은 일체만물과 움직임에 낱낱이 담겨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도 아닌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도는 말에도 게송에도 모든 형상과 움직임에 있다. 다만 그 도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이고 그 도를 알아 닦아 실체를 증명하는 것이 깨친다고 말한다. 말 속에 있는 도를 말로도 움직임으로도 보일 수 있으니 방거사가 마조스님에게 말로 묻고 마조스님은 움직임으로 답한 것이다.

마조스님이 방장실로 돌아간 행동을 두고 방거사는 긍정의 강조를 높인 자답(自答)을 하였다.
방 거사는 마조화상에게 다시 물었다. “예컨대 물에는 근골(筋骨)이 없는데, 만 가마를 실은 배를 능히 뜨게 하니 이 이치는 어떠합니까?”
마조화상의 답은 이러했다. “여기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다. 무슨 근육과 뼈를 말하는가?” 이에 방거사는 응답하지 않았다. 응답하지 않는 것도 응답이다. 이를 선문(禪門)에서는 ‘양구(良久)’라고 한다.

마조화상은 방거사가 물의 근육과 뼈를 물어본 것에 대하여 되치면서 도리에 조금이라도 머무르지 말고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경책을 내렸다. 방거사가 응답하지 않은 것은 경책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해준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답은 이와 같이 완전무결(完全無缺)하니 우리 후손은 뼈 속 깊이 새겨 정진하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방거사의 견성오도(見性悟道), 그리고 석두화상과 마조화상의 인가에 대해 참고해야 할 점이 있다. 방거사가 처음 찾아간 석두화상과 마조화상에게 한 질문은 똑같으나 석두화상은 방거사의 입을 막았고 마조화상은 서강(西江)의 물을 다 마시고 오면 답해주겠다고 하였다. 이 두 분의 표현은 다르지만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하니 천하의 비밀을 함부로 누설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처음 본 수행자, 스님도 아닌 거사의 질문이 종문(宗門)의 종지(宗旨)를 한 마디에 노출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만법과 벗하지 아니한 자 어떤 이입니까?” 부처님이 견성오도하여 49년간 8만 4천의 법문을 하셨는데 이를 벗으로 상관치 아니하고 이를 뛰어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는다니 어디 함부로 입을 열겠으며 입을 연다면 큰 강물을 다 마시는 불가능을 행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다. 부정의 부정이다.

부처도 짝이 있고 벗이 있다. 부처님의 몸도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3신불이고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의 3세불이 있으며 3천불과 53불이 있으니 이들이 부처의 짝이고 벗이다. 일개 거사 하나가 이를 넘어 부처 위의 부처를 찾는다니 성냥불 하나로 천하를 태울 질문이다. 이는 생사를 걸고 정진하고 또 정진함으로써 의정(擬定)이 완전 타파(打破)되지 않고는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말이다.

석두화상과 마조화상이라는 대 선지식이 빗나가지 않은 적중한 대답을 함으로 방거사가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였다. 이를 ‘축착합착(築著嗑著)’이라 한다. 옥편에서는 ‘갑’이나 ‘개’로 읽히지만 불가에서는 '합'으로 읽는 이 글자는 ‘두 돌이 서로 부딪쳐 나는 소리’라는 뜻이다. 돌과 돌이 상하 좌우가 하나도 틀림없이 맞다는 뜻으로 강원의 옛 강사스님들은 서장(書狀)을 가리키며 멧돌은 아랫돌 한 중심의 쇠꽂이로 멧돌을 돌려서 곡식을 가루 내듯 정법이 돌아 계계승승한다고 한다.

대오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석두화상이나 마조화상이 저쪽의 돌이라면 방거사는 이쪽의 돌인 것이다. 홀로 있으면 아무리 잘난 돌이라도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니 이 소리가 역대전등(歷代傳燈) 제대조사이다. 이를 ‘줄탁동시’ 혹은 ‘쇄탁동시(啐啄同時)’라고도 한다. 이 말은 중국 송나라 시기의 불서(佛書)인 <벽암록(碧巖錄)>에 등장한 말로서 ‘줄(啐)’은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껍질을 쪼는 것을 말하고 ‘탁(啄)’은 어미 닭이 알 밖을 쪼아 깨트리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가 한 시에 이루어져야 병아리가 탄생하여 수탉과 암탉이 된다. 알 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수행이고 어미가 때를 맞춰 쪼아주는 것은 선지식의 인가이다. 방거사가 아무리 수행을 잘 하고 뛰어난 깨달음을 얻었을 지라도 선지(禪旨)를 거래(去來)한 석두화상과 마조화상의 깨우침이 있기에 방 거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수행하여 득력(得力)하면 선지식을 찾아야 하고 선지식은 올바른 수행자를 만나 종지를 이어가야 한다. 종지에는 국경도 노소도 승속도 없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이후부터 국운이 지극히 어지러웠던 한말(韓末)과 근대 불교 분규라는 참극 속에 가장 큰 타격은 종지 혈맥(血脈)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었다는 것이다. 실망과 한탄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극복하여 중국의 5가지 7종이 번성한 것과 같이 모두가 수행에 힘쓰면 제불보살이 우리를 도우리라 믿는다. 종지 혈맥을 이어갈 여러 나라 중 유력한 희망을 가진 나라가 우리나라임을 믿는다.

 

               지허스님 (순천 금둔사 조실,  원로회의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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