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 응윤, ‘송인두타’, ‘제천왕봉’, ‘은신유거’ㆍ 끝

 

경암 응윤(1743~1804)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입산하여 진희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지리산 지곡사 한암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당대의 고승인 추파(1718~1774)의 문하에 들어가서 28세에 강학을 전수 받아 강석을 열고 20여 년 동안 후학을 길렀다. 경암은 선지를 깨닫기 위해 가사 한 벌에 바리때 하나를 짊어지고 천산만학을 건너 운수행각을 하고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수행 정진하였다. 그때의 모습이 ‘송인두타(送印頭陀)’에 잘 나타나 있다.

가사 한 벌 바리때 하나 차림으로 一衲單飄外
천산과 수만 계곡을 누비다 千山萬水間
밤은 깊어 향내도 사그라진 뒤 夜深香歇後
불등 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네 趺坐佛燈間

“남의 돈을 세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라며 선지를 깨달은 경암은 지리산 산정에 초막을 짓고 2~3명의 제자와 함께 매일 네 차례씩 정진을 하면서 번뇌와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깨끗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을 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의 선수행 하던 생활은 ‘제천왕봉(題天王峯)’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산기슭은 남국으로 뻗어 서리어 들고 展脚蟠南國
붉은 빛 허공에 산머리를 들어 올렸네 擡頭入紫虛
백운에 잠기어 찾아 볼 수 없고 白雲藏不得
선굴에 상반신의 인간만 살고 있네 仙窟半人居

백두대간의 정맥으로 지리산을 상징하는 천왕봉은 아침이면 동쪽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아 붉게 빛나고, 저녁이면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다. 그리고 천왕봉은 늘 백운에 가리어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세상에 노출되는 것을 지극히 꺼렸던 경암 ‘자신’의 모습을 상징한다. 아울러 신비함을 간직한 천왕봉 선굴의 ‘반인(半人)’은 가부좌를 틀고 선정에 든 경암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경암은 지리산 산정에서 초막을 짓고 참선수행을 하며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며 탈속한 삶을 살았다.

천지사방에서 뿜어 나와 하얗게 퍼들퍼들 날고 乾坤噓出白飛飛
천봉만학에 지나가는 비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行雨千峰不復歸
초목은 크고 작건 간에 모두 크게 자라는데 草木高低皆發育
또 맑은 달을 따라 신신의 집 사립문을 닫는다. 又隨淸月鎖仙扉

화자가 사는 공간은 지리산 정상이라 절기가 봄이 왔건만 봄눈이 ‘퍼들퍼들’ 날리고, 가끔 지나가는 비가 지리산의 여러 산봉우리와 골짜기에 내리자, 크고 작은 초목들은 모두 싹이 움트고 자란다. ‘청월(淸月)’은 천상의 ‘밝은 달’이라는 의미와 함께 ‘부처님의 법음’ 혹은 ‘부처님의 깨우침’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로 읽힌다. 이러한 자연의 이법에 따라 순응하며 생활하니 조금도 조급할 것이 없다. 이처럼 경암의 삶의 공간은 지리산 깊은 산속의 산사였다. 그는 이곳에서의 자연과 하나가 되거나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면서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안신낙도(安身樂道)를 추구하였다. ‘은신유거(隱身幽居)’에는 안신낙도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저녁 바람 부는 노송 숲은 어두워지고 晩風松檜暗
손톱 달 아래 두견새가 우는구나. 新月杜鵑啼
이곳이 진정으로 안신낙도를 할 수 있으니 此處眞安樂
또 다시 서쪽을 찾아갈 필요가 있겠나? 何須更往西

산속에서의 생활은 세간에서 사람들과 경쟁하고 부딪치며 생기는 갈등보다는 달빛아래에서 들리는 ‘솔바람’소리와 여기에 더하여 ‘두견새 울음’소리가 법음처럼 들려 화자의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있다. 자신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안신낙도를 할 수 있으니 여기가 바로 서방정토라는 화자이다. 이처럼 경암은 만유의 실체인 일심(一心)을 강조하여, 대립과 차별 보다는 승속불이하고 자연일여의 조화로움을 지향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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