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 ⑮

何名淸淨身佛 善知識 世人性本自淨
萬法在自姓 思量一切事
卽行依1)惡 思量一切善事 便修於善行
知如是 一切法盡在自姓 自姓常淸淨

어찌하여 청정한 법신(法身)이겠는가? 선지식아! 세인의 성품은 본래 스스로 청정하다. 만법은 자기 성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일체를 사량하는 일은 싫어하는 마음에 의지하여 행해지는 것이니 모든 선한 일을 사량하여 선행을 닦음으로써 익혀내야 한다.
이와 같이 알지라, 일체법이 다하는 것이 자성이 나타나는 것이니 자성은 항상 청정하다.

 

청정한 법신(法身)인 비로자나 부처님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은 중생 각자가 비로자나 부처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중생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고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려면 그동안 탐(貪), 진(嗔), 치(痴) 삼독(三毒)심에 찌들어 살았던 세속적 삶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그러나 양심은 알고 있다. 지금껏 자신의 삶은 욕망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었음을. 또한 매번 욕망이 주는 패배감을 배차 경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가르침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정된 기준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고정관념이 만든 아집이기도 하다. 도(道)를 구하는 자의 마음가짐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세우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신의 잣대로 진리를, 또는 선지식을 사량하는 마음을 조복 받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수행에 속한다. 특히 지적 수준이 높은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심리적 갈등은 외면의 대상이다.

‘사량일체사 즉행의오(思量一切事 卽行依惡)’ ‘일체를 사량하는 일은 곧바로 싫어하는 행을 낳게 된다.’는 의미이다. 싫고 좋음의 이분법적 사고는 항상 ‘자신’이 전제돼 있기에 발생한다. 선악의 기준이 나 자신에 기인하여 결정된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려면 무아(無我)의 덕목이 필요하다. 만사가 일어나되 그 일에 ‘나(我)’를 세우지 않으면 오욕칠정의 가치는 발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인간 심리는 자신에게 관심 없는 일은 사량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나를 전제하기에 만사를 검색하고 점검하며 자기에게 필요한 순서대로 분류해 놓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심리 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선(善)한 것을 사량하고, 선행(善行)을 실천하여 닦아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은 자성(自性)이 청정하기 때문인데 자성(自性)이 청정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성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스스로의 성품’은 상호 의존성에 지배받지 않는 절대적 존재임으로 본래부터 청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日月常名2) 只爲雲覆蓋 上名下暗
不能了見 日月西3)辰 忽遇惠風 吹散卷盡雲霧
萬像參羅 一時皆現 世人性淨 猶如淸天
惠如日 智如月 智慧常名 於外著敬
妄念浮雲 蓋覆自性 不能明故 遇善知識 開眞法
吹却名妄 內外明徹 於自性中 萬法皆見 一切自在性

해와 달은 늘 이름인 것이다. 다만 구름에 겹으로 덮일 뿐이다. 위(겉)는 이름이고 아래(속)는 어두우니 분명하게 볼 수 없다. 해와 달, 서향에 별들이 문득 우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운무가 모두 흩어지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모두 나타난다. 세인의 성품도 청정하여 마치 푸른 하늘과 같다. 혜(慧)는 태양이요 지(智)는 달과 같다. 지혜도 늘 이름일 뿐이니 겉에 집착함을 경계하라! 망념의 뜬구름은 자성을 뒤덮어 밝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선지식을 만나 참된 법이 열리면 망령된 이름을 날려버리니 안팎이 꿰뚫어져 밝아진다. 그래서 ‘스스로’의 성품에서 만법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니 모든 것은 본연히 존재하는 성품인 것이다.

‘일월상명 지위운복개(日月常名4) 只爲雲覆蓋)’의 명(名)을 일반적으로 명(明)으로 수정하여 번역하지만, 이렇게 수정하면 의미 전달에 차질이 발생한다. 즉 ‘해와 달이 항상 밝은데 다만 구름이 덮여있어 어둡다.’라고 해석을 하면 다음 문장에 등장하는 ‘상명하암[上明(名)下暗]’과 자연스러운 해석이 어려워진다. 이유는, 구름이 덮였는데 어찌 위만 밝을 수 있는가? 그래서 비유하기를 낙조 때 반만 구름이 걸쳐 있는 광경으로 설명하지만 그런 비유라면 법신(法身)이 색신(色身)에 반만 덮여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중생들은 반이 노출돼 있는 법신을 보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수정 없이 ‘명[名: 이름·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면 그 비유에 있어서 앞뒤 문맥이 자연스럽게 상통한다. 유식(唯識)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이 삼성(三性)5) 즉,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의 허망분별식 때문에 원성실성을 보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허망분별식은 모두 개념을[이름·명칭] 바탕으로 판단하는 특성을 말한다. 의식의 지각 작용은 실체를 이미지(想)화시킨 것만이 인지 가능한 한계를 갖고 있다. 혜능은 이런 복잡한 유식(唯識)의 개념을 ‘해와 구름’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해와 달’은 빛을 상징하지만 그 명칭이 해와 달일 뿐이다. 이름이 실체가 아니기에 그 실존과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 또한 물리적 특성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각기 별개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이 개념[명칭, 이름]들을 그 존재 실체와 동일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착각 현상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세상을 판단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인지 작용의 한계인 것이다.

해의 실체는 구름이 덮어 버리면 알 수 없는 것인데[:下暗] 어리석게도 그 덮개[:名]가 실체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니 인간이 허상에 지배당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비유에서 안목을 조금만 확장시켜 물리적인 측면으로 보면 새로운 안목이 열릴 수 있다. 물리적으로 구름은 해를 절대로 완전히 덮을 수 없다. 태양과 구름의 크기를 비교해 보라, 태양의 크기에 비하면 구름은 먼지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에게는 구름이 태양을 덮었다고 100% 믿고 있다. 그것은 구름이 인간의 눈에 가까이 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손바닥이 눈을 가린 격인데 그 작은 티끌이 온 세상을 덮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즉 내 마음을 가리고 있는 미진(微塵)이 내 눈앞에 가까이 있는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면 인간의 어리석은 판단은 온 우주 법계를 덮고도 남을 것이다. ‘일체자재성(一切自在性)’, 부처님의 ‘일체 만법은 12처(處)’6)라는 가르침과 동일한 의미다. 마음은 무한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이며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오감(五感)이라는 다섯 가지 센서를 통해 얻어진 정보들을 의식이 취합하여 의미 부여한 자기중심적 ‘기억작용’일 뿐이다. 이 단락의 해석은 기존의 해설서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名’자를 수정 없이 그대로 사용함으로 그러한 것이다. 본질적인 의미로는 별 차이가 없을지는 모르겠으나 실질적으로 의식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큰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대상에 집착하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고집에서 오는 소통의 부재와 어리석은 판단을 줄일 수 있다. 작금의 정보화 시대에서는 밀려오는 정보를 감지하기도 바쁘기에 언감생심(焉敢生心) 자신을 돌이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운 환경이다. 하지만 오탁에도 연꽃은 피어날 수 있는 법이니 대상을 통해 자신을 비춰내는 힘을 기른다면 정보화 시대에도 깨닫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불교신문 2022년 신춘문예 평론부문 입상자

【각주】
 1) 본서에는 衣를 依로 수정함.
2) 이(異)본에는 明으로 되있지만 수정 없이 그대로 사용함.
3) 이(異)본에는 星으로 되있지만 수정 없이 그대로 사용함.
4) 이(異)본에는 明으로 되있지만 수정 없이 그대로 사용함.
5) 유식의 삼성설: 유식학파를 대표하는 교설로 인식과 존재의 방식을 세 가지 형태로 설명함.
6) 색,성,향,미,촉,법의 내외(內外) 6입처(入處)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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